수사와 기소의 분리,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의 출범 등 대한민국 형사사법체계가 커다란 전환점을 맞고 있다. 그러나 제도의 명칭이나 권한 배분보다 국민이 진정으로 묻고 있는 것은 따로 있다. “내가, 혹은 내 가족이 범죄를 당했을 때 국가가 즉시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는가”, “수사 과정에서 또 다른 상처를 입지는 않는가” 하는 실질적인 질문이다.
형사사법의 기본 책무는 억울한 사람을 없게 하고 죄지은 범죄자에게 합당한 책임을 묻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범죄로 삶이 파괴된 피해자에게 국가가 즉시 보호와 회복의 손길을 내미는 것 또한 핵심적인 임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제를 현장에서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출발점은 결국 ‘현장 중심의 예산과 인력’이다.
범죄피해자 보호와 지원 업무는 ‘범죄피해자 보호법’에 따라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책임지는 구조다. 법무부는 범죄피해자 구조금 및 회복지원 사업을 담당하고, 지방자치단체는 의료와 복지, 상담 자원을 연결한다. 그리고 경찰은 범죄 발생 직후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피해자의 신변 안전을 확보하고, 초기 긴급 지원과 관계기관 연계를 수행하는 ‘최일선 방어선’ 역할을 맡는다.
수사와 기소가 분리되는 대전환기일수록, 경찰의 초기 대응과 피해자 접촉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피해자가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범죄가 발생한 직후에 가장 크다. 이 ‘초기 골든타임’에 경찰이 현장에서 신속하고 세심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이후 어떠한 사후 지원도 실효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피해자 보호 예산을 단순히 기존 기관 간의 권한이나 예산 분배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피해자의 접점인 경찰 현장에 걸맞은 인력과 긴급 사업 예산이 우선적으로 배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관 간 협의 지연이나 예산의 기득권 유지 때문에 피해자가 제도 개편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긴급 의료비와 생계비, 임시숙소, 신변보호, 통역, 아동·장애인 전담 지원 등 현장에서 즉시 필요한 사업의 법적 근거와 담당 기관을 명확히 하고, 피해자가 여러 기관을 전전하지 않도록 통합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피해자 보호다.
성폭력·가정폭력·아동학대 등 폭력 피해자를 위한 ‘해바라기센터’ 역시 피해자 보호의 핵심 거점이다. 의료와 상담, 수사·법률 지원을 원스톱으로 제공하여 피해자가 경찰서, 병원, 상담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피해 사실을 반복 진술하는 고통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센터는 경찰에게도 단순한 외부 협력기관이 아니다. 경찰관 개인의 의지와 인내만으로는 피해자의 심리적, 의료적 회복을 다 감당하기 어렵다. 전문기관과의 상시 협력체계가 갖춰져야만 경찰도 ‘피해자 안전 확보’와 ‘증거 수집 및 수사’라는 두 가지 과제를 균형 있게 수행할 수 있다.
필자가 대구광역시 자치경찰위원회 사무국장 재직 시절, 대구지역에 ‘통합형 해바라기센터’를 유치하기 위해 오랜 기간 공을 들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구·경북처럼 넓은 생활권과 지역 간 의료·상담 인프라 편차가 존재하는 곳일수록 광역 거점으로서의 통합형 센터가 절실하다. 야간·휴일의 긴급 대응 체계를 강화하고, 경찰 현장과 의료·복지 자원을 유기적으로 잇는 거점이 마련되어야 2차 피해를 막고 피해자의 실질적 회복을 도울 수 있다. 빠른 시일내에 반드시 유치되어야 한다.
피해자 보호 현장의 인력 구조 역시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 현재 일선 경찰서의 피해자 보호 담당 인력은 상담, 신변 안전조치, 긴급 지원, 기관 연계, 사후 모니터링에 각종 행정업무까지 과중한 부담을 안고 있다. 피해자 보호는 단순한 서류 처리가 아니라, 피해자의 위험성을 판단하고 지속적인 안전을 관리하는 고도의 전문 업무다. 담당 인력이 과부하에 시달리면 초기 상담과 사후관리는 형식화될 위험이 크다. 경찰서별 사건 수와 관할 인구, 치안 수요를 정밀히 반영하여 피해자 보호 담당 인력을 증원하고 현실화해야 한다. 아울러 범죄 현장의 고통을 매일 접하는 일선 경찰관들의 간접 외상(트라우마)을 예방하고 치유할 수 있는 제도적 지원도 병행되어야 한다.
경찰청, 행정안전부, 법무부, 지방자치단체는 상호 협업의 틀을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야 한다. 경찰은 현장 긴급 안전조치와 초기 대응을, 지자체는 지역 복지와 주거 자원 연계를 분담하되, 기관별 ‘실적’이 아닌 ‘피해자가 얼마나 신속하고 안전하게 일상으로 복귀했는가’를 성과 평가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형사사법체계 개편의 성패는 복잡한 법률 조항이나 기관의 명칭이 아니라, 피해자가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온도에 달려 있다. 신고했을 때 경찰이 얼마나 신속하게 달려오는지, 안전한 장소에서 보호받으며 상담할 수 있는지, 수사 과정에서 존중받고 있는지에 국민이 느끼는 형사사법의 신뢰가 형성된다.
현장에서 피해자를 가장 먼저 만나고 위험을 판단하며 그 손을 잡아주는 주체는 단연 경찰관이다. 그렇다면 경찰에게 책임과 의무만 물을 것이 아니라, 피해자를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권한과 전담 인력, 그리고 즉각 집행가능한 예산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 ‘현장’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이다.
범죄피해자 보호 예산은 남는 재원을 쪼개어 편성하는 부수적 예산이 아니다. 형사사법 시스템 전체의 정당성을 지탱하는 중요한 약자 보호 예산이다. 제도의 대전환기에 피해자가 소외되거나 불안해하지 않도록, 현장 경찰의 피해자 보호 역량을 대폭 보강하는 것이 새로운 형사사법체계가 국민에게 제시해야 할 가장 첫 번째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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