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가 없어 투표를 하지 못했다는 소식은 분노를 넘어 허탈함마저 안겨준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나 행정상의 착오로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뿐일지도 모를 선택의 기회가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졌다는 사실,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린 사건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분노는 지극히 정당하다. 오히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참정권은 단순한 권리가 아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주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확인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태에 분노하는 시민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그 감정 자체가 민주주의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2030 세대를 중심으로 송파구 일대에 모인 시민들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격한 구호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분열이 아닌 권리 회복을 이야기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움직임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시민의 모습은 그 어떤 장면보다 민주주의답다.
이처럼 정당하고 의미 있는 움직임 속에서도 아쉬운 장면은 존재한다. 경찰을 향해 ‘가짜 경찰’이나 ‘중국 공안’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제기하고, 이를 희화화하는 영상들이 확산되고 있다. 경찰청은 이에 대해 분명히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물론 공권력은 언제든 비판받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그러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의혹과 조롱은 비판이 아니라 왜곡에 가깝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비판할 자유’와 함께 ‘정확하게 비판할 책임’이다. 불신과 조롱이 커질수록 정작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은 흐려진다. 지금 시민들이 보여주고 있는 성숙함은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차분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 속에서 더욱 빛난다.
또 한 가지 짚어야 할 점은 일부 현장에서 나타난 물리적 충돌과 업무 방해의 문제다. 체육협회의 업무가 가로막히는 상황까지 이어졌다는 점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아무리 정당한 요구라 하더라도, 다른 이의 일상과 공적 기능을 멈추게 한다면 그 정당성은 스스로 훼손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나의 권리’뿐만 아니라 ‘타인의 권리’까지 함께 존중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해외의 사례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독일과 영국, 일본 등은 집회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면서도, 공공질서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에는 분명한 기준을 적용한다. 중요한 것은 통제가 아니라 ‘균형’이다. 표현의 자유와 공동체 질서가 조화를 이룰 때, 시민의 목소리는 더욱 오래, 그리고 강하게 힘을 갖는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분명하다. 국민의 참정권이 현장에서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어떤 이유로도 축소되거나 흐려져서는 안 된다. 재선거 요구, 국정조사, 특검 등 다양한 문제 제기는 모두 정당하며, 그 목소리는 책임 있는 방식으로 이어질 때 더욱 큰 설득력을 갖는다.
국가는 이번 사태의 전 과정을 한 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엄정한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참정권은 결코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분노는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 분노가 향하는 방식 또한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실에 기반한 비판, 절제된 표현, 타인의 권리에 대한 배려가 함께할 때, 우리의 요구는 더욱 정당해지고 더욱 강해진다.
이번 사태가 단순한 분노로 끝나지 않고, 우리 사회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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