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 엄마! 저는 빨간 날이 싫어요.”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시절, 나는 부모님께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서 ‘빨간 날’이란 달력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일요일과 공휴일을 뜻한다. 그때는 토요일에도 수업이 있던 시절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공휴일이면 친구들을 만날 수 없었고, 운동장에 모여 축구를 하거나 신나게 뛰어놀 수도 없었기에 어린 나는 공휴일이 참 싫었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그저 귀엽게 바라보셨다. 공휴일이 되면 어김없이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학교 운동장에 모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그러니 며칠씩 이어지는 긴 연휴는 더더욱 반갑지 않았다. 특히 추석이나 설 같은 대명절에는 친구들과 떨어져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어져 마음이 무척 답답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50대 후반이 된 지금도 나는 긴 연휴가 그리 반갑거나 행복하지 않다.
많은 사람이 긴 연휴를 손꼽아 기다린다. 여행을 떠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평소 미뤄두었던 취미를 즐긴다. 하지만 나는 여행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다. 딱히 익숙한 취미가 많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논문을 쓰며, 미완성 원고를 다듬는 시간이 훨씬 편안하고 행복하다.
방학의 정적보다는 학기 중 북적이는 캠퍼스가 좋다. 학생들이 바쁘게 오가고, 동료 교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강의실마다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학교의 일상이 참 좋다.
나는 글 쓰는 일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글재주가 뛰어나거나 글을 아주 잘 쓰는 편은 아니다. 다만 글을 쓰며 생각을 정돈하는 그 시간을 사랑한다. 생각과 글쓰기는 늘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머릿속을 떠돌던 흩어진 생각들이 문장으로 맺히는 순간, 비로소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는지 명확히 깨닫게 된다.
지금도 서재와 연구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아직 세상에 내놓지 않은 칼럼과 논문이 수북이 쌓여 있다. 글 속에서는 무엇이든 자유롭게 말하고 제안할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제안한 의견이 실제 정책으로 결정되고 집행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교수로서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
내 연구실 책상 한쪽에는 새우깡, 바나나킥 같은 정겨운 과자들이 늘 놓여 있다. 여기에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만 더해지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나에게는 그 순간이 지상낙원이요, 내 연구실은 나만의 근사한 무릉도원이다.
강의하는 일 역시 내게는 큰 즐거움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운동회나 소풍, 학예회와 송년회, 신입생 환영회 등 각종 모임에서 사회를 맡는 일은 늘 나의 몫이었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되면 자연스럽게 마이크가 내 손에 들려 있었고, 큰 목소리로 노래도 자주 불렀다. 노래를 특출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나누고 함께 웃는 그 분위기가 그저 좋았던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때 뮤지컬 배우나 판소리꾼을 꿈꾸기도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도 그쪽 분야로 진출해 보라고 적극 권유해 주셨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가 컸고, 부모님을 설득하거나 꿈을 끝까지 밀어붙일 용기 또한 부족했다. 결국 나는 일찌감치 학문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온 것만은 아닌 듯하다. 교수라는 직업을 통해 마음껏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강연하며, 학생들과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고 있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꿈꾸던 무대와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나에게 꼭 맞는 또 하나의 무대가 주어진 셈이다. 어쩌면 교수의 길이야말로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던 나의 천직인지도 모르겠다.
원 없이 글을 쓰고, 마음껏 강의하며,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삶. 그러니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행복은 의외로 가깝고 소소한 곳에 있다. 마음에 드는 책 한 권, 손때 묻은 익숙한 연구실, 시원한 커피 한 잔,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오늘 하루가 행복의 전부일 수 있다.
우리는 때때로 남들이 정해놓은 행복의 기준을 무작정 따라가려 한다. 긴 연휴에는 어디로든 여행을 떠나야 하고,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이벤트를 해야 하며, 남들에게 보여주기 좋은 삶을 살아야 행복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행복의 모양은 사람마다 전혀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남들의 기준에 맞춘 행복을 무작정 흉내 내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무엇이 가장 편안한지, 언제 내 마음이 살아 숨 쉬는지 스스로 알아가는 일이다. 행복은 모두에게 똑같은 날짜나 모양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달력에 새겨진 빨간색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 반응하는 ‘나만의 색깔’을 발견하는 일이다.
나는 여전히 달력의 빨간 날이 마냥 반갑지는 않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명확히 안다. 나에게 행복은 달력에 표시된 특별한 휴일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이 평범하고 소중한 ‘오늘’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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