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야. 휴대전화를 잃어버렸어. 빨리 돈 좀 송금해줘”
이제 이런 목소리만으로는 가족을 확인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생성형 AI(인공지능)과 음성합성기술의 발전으로 가족이나 지인의 목소리를 짧은 음성만으로도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바 딥 보이스 보이스피싱이다.
보이스피싱은 이제 낯선 용어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등장한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국세청이나 우체국을 사칭해 세금 환급이나 개인정보 확인을 요구했다. 때로는 “자녀를 납치했다”며 울음소리와 비명을 들려주고 돈을 보내라고 협박했다. 이후에는 ‘김미영 팀장’으로 대표되는 대출 사기가 등장했다. ‘저금리 대출’, ‘당일 승인’, ‘신용등급이 낮아도 가능하다’는 문자메시지를 무차별적으로 뿌린 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서민들의 절박함을 노렸다.
또 한때는 외국 조직의 어눌한 말투와 엉성한 시나리오 때문에 보이스피싱이 코미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웃고 있는 동안 범죄자들은 끊임없이 진화했다. 국내 말투를 구사하는 상담원을 고용하고, 악성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피해자의 통화를 가로채는 첨단 기술을 도입했다. 경찰이나 금융기관에 확인 전화를 걸어도 범죄 조직으로 연결되도록 만든 것이다.
최근에는 범죄의 거점도 해외로 이동했다.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등에 대규모 콜센터를 차려놓고, 고수익 아르바이트나 해외 취업을 미끼로 청년들을 유인한 뒤 감금하거나 협박해 범죄에 동원하는 사례까지 나타났다. 이제 보이스피싱은 단순한 전화 사기를 넘어 국제조직 범죄이자 인신매매, 감금, 강제노동이 결합된 흉포한 강력범죄가 됐다.
그러나 수법이 아무리 달라져도 보이스피싱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범죄자는 피해자를 불안하게 만들고, 고립시키며, 생각할 시간을 빼앗는다. 경찰이나 검찰,금융기관을 사칭해 권위를 내세우고,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한다”며 긴급성을 조성한다. 이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 “전화를 끊지 말라”고 요구해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도록 통제한다.
최근 수법인 딥 보이스는 여기에 가장 강력한 심리적 무기를 더했다. 피해자가 가장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모방하는 것이다.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면 사람은 논리적 판단보다 보호 본능이 먼저 작동한다. 특히 자녀가 사고를 당했다거나 납치됐다는 말을 들으면 부모는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보다 어떻게든 자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 순간 판단이 마비되고, 범죄자의 지시에 따르게 된다.
어르신 층에게는 자녀 문제와 기관 사칭이 주요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중장년층에게는 대출과 투자, 청년층에게는 고수익 아르바이트와 취업이 범죄의 미끼가 된다. 젊은 부모에게는 어린 자녀의 사고나 납치가 가장 큰 공포가 될 수 있다. 범죄 조직은 이처럼 피해자의 연령과 직업, 상황에 맞춰 맞춤형으로 심리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다시 말해서 범죄자는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다는 점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AI(인공지능)가 범죄의 자동화와 맞춤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AI 챗봇이 먼저 피해자와 대화하면서 반응을 살핀 뒤, 가능성이 높은 사람에게 전문 상담원이나 딥보이스 통화를 연결할 수 있다. 딥 페이크 영상으로 가족이나 유명인을 사칭하거나, AI로 연인처럼 대화하며 신뢰를 쌓은 뒤 돈을 요구하는 ‘AI 로맨스 스캠’도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범죄 앞에서 피해자 개인에게만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보이스피싱은 개인의 부주의가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의 허점을 이용하는 구조적 범죄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물론 금융기관, 통신사, 지방자치단체, 복지기관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공유하고 이상 징후를 공동으로 탐지해야 한다.
금융기관은 평소와 다른 고액 이체나 반복적인 송금이 발생할 경우 즉시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통신사는 발신번호 변작과 악성 링크를 신속히 차단해야 한다. 경찰과 지자체는 고령층과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실제 사례 중심의 반복적인 예방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지역별 피해 유형을 분석한 맞춤형 예방 활동도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현장 중심의 자치경찰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생활안전 업무 중 하나다.
피해가 의심될 때는 행동이 중요하다. 돈을 요구하는 전화를 받으면 우선 전화를 끊어야 한다. 가족이나 지인의 평소 번호로 다시 전화해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이미 송금했다면 즉시 거래 금융기관에 지급정지를 요청하고,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악성 앱을 설치했다면 해당 휴대전화로 금융거래를 계속하지 말고 다른 기기를 이용해야 한다. 문자나 통화기록, 계좌번호, 송금 내역도 삭제하지 말고 증거로 보관해야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보이스피싱은 치밀하게 설계된 심리범죄다. 피해자는 돈뿐만 아니라 자존감과 신뢰까지 잃는다. “왜 그런 말에 속았느냐”고 다그치면 피해자는 신고를 포기하거나 사실을 숨길 수 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함께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이 피해 회복과 추가 피해 예방의 출발점이다.
최첨단 인공지능 시대에 목소리와 영상은 더 이상 신원을 확인하는 충분한 증거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서로를 불신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사람일수록 한 번 더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가족끼리 평소에 확인 질문을 정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돈을 요구하는 전화가 오면 반드시 통화를 끊고, 평소 알고 있던 번호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 절대로 경찰이나 국세청 등 수사기관과 금융기관은 전화로 돈을 보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급할수록 멈추고, 목소리가 같아도 확인하고, 피해가 의심되면 즉시 신고해야 한다.
보이스피싱은 사람의 마음을 공격하는 범죄다. 따라서 대응 역시 기술과 제도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가족의 관심과 이웃의 돌봄, 지역사회의 연대, 기관 간 협력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범죄가 아무리 지능화되더라도 사회가 함께 관심을 갖고 대응한다면 피해는 줄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목소리를 복제하는 시대일수록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서로를 보호하기 위한 확인과 연대의 문화다. 의심은 불신이 아니다. 소중한 사람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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