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로지일(劬勞之日)’ 부모 노고 먼저 기린 조선의 선비들
-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계암일록』 등 조선시대 선비 일기 속 생일 풍속 조명
- 자신 성취 앞에서도 부모 은혜 되새겨…현대 생일 문화에 깊은 울림

자녀의 생일이 다가오면 부모의 손길은 분주해진다. 화려한 생일상을 차리고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하며, 아이의 친구들을 초대하는 일까지 모두 부모의 몫으로 돌아간다. 현대 사회에서 생일은 철저히 ‘축하받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소비되지만, 그 배경에 있는 부모의 눈물과 노고는 자연스럽게 가려지기 일쑤다.
그러나 400여 년 전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생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 날이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축하를 받는 날이 아니라, 자신을 낳아 기른 부모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는 날이었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이 소장한 영남 선비들의 일기 자료에는 이처럼 부모의 은혜와 연결해 생일을 기억했던 당시의 독특하고도 따뜻한 풍속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예천의 선비 권문해(1534~1591)가 남긴 『초간일기』를 보면, 그는 자신의 생일날 가장 먼저 떡을 빚어 사당에 모신 부모에게 올렸다. 자녀와 친척들에게 축하를 받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생일의 첫 새벽을 부모를 기리는 의식으로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선비들의 생일 문화는 안동 예안의 선비 계암 김령(1577~1641)이 38년간 기록한 『계암일록』에서 더욱 뚜렷하고 깊이 있게 확인된다.
김령은 일기 속에서 자신의 생일을 언제나 ‘구로지일(劬勞之日)’이라고 칭했다. 이는 ‘부모가 자식을 낳고 기르느라 수고한 날’이라는 뜻이다. 그에게 생일은 태어난 기쁨을 누리는 날이기 이전에, 어머니의 해산 고통과 아버지의 양육 노고를 먼저 떠올리는 숙연한 날이었다.
38년 동안 이어진 김령의 생일 맞이는 한결같았다. 생일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음식을 마련해 사당의 부모에게 먼저 올리며 감사의 마음을 일기에 기록했다. 심지어 몸이 아파 직접 예를 올리지 못하는 해에는 자녀들에게 대신 제를 올리도록 당부하면서까지 그 마음을 대를 이어 가 전했다.

그가 남긴 일기 곳곳에는 부모를 향한 애틋한 사부곡이 묻어난다. 용무로 서울에 머물던 1612년 생일에는 자신이 태어난 주자동을 회고하며 "다행히도 문과급제까지 했으니, 선친을 추모하는 마음이 넓은 하늘처럼 그지없다"라고 적었다. 관직 출세라는 개인의 커다란 성취 앞에서도 그 공을 부모의 은덕으로 돌린 것이다.
2년 뒤인 1614년 생일에는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덕을 어떻게 갚을 것인가. 오직 눈물만 흘릴 뿐이다"라며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했고, 마을에 홍역이 돌았던 1623년에는 부모에게 잔을 올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일기에 고스란히 담아내기도 했다.
오늘날의 생일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선물을 주고받는 축제의 날로 여겨진다. 그러나 400년 전 선비들의 빛바랜 일기장은 생일의 진짜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다시금 묻는다.
한국국학진흥원 관계자는 “조선시대 선비들은 생일을 축하의 날이자 부모에 대한 감사의 날로 여겼다”라며, “38년 동안 이어진 김령의 기록을 통해 오늘날 생일이 지닌 진정한 의미와 희미해져 가는 가족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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